윤봉길(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재의 루쉰 공원)에서 일본인 고관 여러 명을 살해하는 폭탄을 터뜨린 한국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윤봉길 기념비는 한국(서울), 중국(상하이), 일본(카나자와)에 세워졌다.
윤봉길의 출생
윤봉길은 1908년 6월 대한제국 황혼기에 예산군에서 태어났다. 덕산초등학교를 다녔고, 오치서숙(한국어와 중국어를 가르치는 마을학교)에서도 공부했다.
한국이 1905년 일본 제국 내에서 보호국이 되면서 윤씨는 곤경에 처한 나라에서 자랐다. 1910년 한국 병합과 함께 지역 저항은 상당히 커졌다. 일본 당국에 의해 공격적으로 진압된 1919년 3•1 운동(수백 명의 시위대가 일본 경찰과 군대에 의해 학살)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후에 뒤따르는 잔혹한 탄압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중국으로 도피했다.
농촌사회운동
농민을 계몽하기 위해 저녁학교를 조직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가난한 청년들을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농민독서' 라는 교재를 썼다. 농촌 발전과 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재흥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그해 2월 18일 센터에서는 축제를 열고 '토끼와 여우'라는 제목의 연극를 공연하였다.
"농촌에서 문화 활동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이 모여 성황리에 마무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은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농촌 활동을 계속하다가 이 운동을 바탕으로 한 농민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농촌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을 건강한 몸으로 키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민의 건강을 증진시켰다.
1926년까지 윤씨는 그의 고향에서 저녁 수업을 시작하여 이 문제에 대해 농촌 지역 주민을 교육하는 것을 돕기 위해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스무 살에 독서회를 조직하고 팸플릿을 여러 권 출판했다.
중국으로 망명
1930년 민족주의 운동을 위해 두 개의 농촌 체육회를 설립한 후, 윤씨는 일본의 탄압으로 중국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죽어서 큰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서 귀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지(1930년)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출옥 후 만주로 도망쳐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김태식, 한일진을 만나 독립을 결심하였다.
윤봉길은 한국의 임시정부에 가야만 성공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상해로 향했다. 그는 랴오둥 반도 남쪽의 다롄을 거쳐 산둥 성 칭다오로 혼자 갔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그는 돈을 모으고 독립을 계획할 장소를 찾았다. 마침내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 안공근의 집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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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시도했다. 우선 그는 한국인 사업가 박진씨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또한 상하이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인 김구(1876~1976)를 찾아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했다.
훙커우 공원 폭파 사건
윤봉길은 대한애국단에게 한 다짐
"나는 우리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한국을 침략하고 있는 적들의 군사 지도자들을 죽이려고 대한애국협회 회원으로서 이 맹세를 한다."고 적혀 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맞아 일본 육군(IJA)이 마련한 기념행사에 물병으로 위장한 폭탄을 가져갔다 (수류탄을 던졌지만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현대 뉴스 보도도 있다)
이 폭탄으로 상하이 주재 일본인을 위한 관방장관 카와바타 사다지(川田寺)가 사망하고, 1932년 5월 26일 부상으로 사망한 시라카와 요시노리 장군이 치명상을 입었다.
중상자 중에는 일본 제국군 9사단장인 우에다 겐키치 중장과 상하이 주재 일본대사 시게미쓰 마모루 등이 포함돼 있어 모두 다리를 잃었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 쿠라마츠 무라이(武井)가 머리와 몸에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자살 시도
이어 윤봉길은 도시락으로 위장한 두 번째 폭탄을 터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더이상의 폭발은 없었고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라는 기자가 전한 영구의 뉴스 매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본 국가가 연주되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앞으로 나와 다이스 앞에 실린 원통을 놓고 뒤로 쏜다. 즉시 둔탁한 폭발이 뒤따랐지만, 너무 작은 관심을 끌어서 음악이 계속 연주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부상과 출혈로 쓰러지는 것이 목격되었고, 군인들은 청년을 붙잡아 그를 구타했다. 이어 같은 패턴의 폭탄이 또 발견됐다고 말했다.
이에 윤봉길은 5월 25일 상하이에서 일본 군사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후 11월 18일 오사카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 후 9사단 본부인 이시카와 가나자와로 옮겨졌다. 윤봉길은 12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의 시신은 가나자와 노다야마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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