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가 학교에서 당연하게 배우는 ‘남북국 시대’라는 말, 사실 유득공과 그의 책 『발해고』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다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만 배웠지, 그 시기 북쪽에 거대한 고구려의 후예, 발해가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동안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거든요.
이걸 늦게 알면 괜히 우리 역사의 영토와 자부심을 절반만 알고 가는 셈이죠. 오늘은 왜 한 명의 학자가 쓴 책 한 권이 우리 역사의 지도를 통째로 바꿔놓았는지, 그 짜릿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알려줘야 할 내용이니까요.
발해, 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나?
솔직히 이건 좀 충격적일 수 있는데,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발해는 우리 역사의 ‘주류’가 아니었어요. 그냥 북쪽에 있었던, 말갈족이 세운 다른 나라 정도로 취급받기 일쑤였거든요. 참 이상하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스스로를 칭했던 나라인데 말이에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역사는 결국 기록하는 자의 관점이 반영되니까요. 신라의 삼국통일을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신라의 이야기 위주로 역사가 정리됐어요. 고려 역시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국가 차원에서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는 소홀했던 셈이죠. 고려의 대표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도 발해는 빠져있거든요.
결국 수백 년 동안 발해는 우리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변방의 역사, 혹은 잊힌 역사로 떠돌게 된 거예요. 우리가 만약 이 상태로 계속 역사를 배웠다면, 한반도 남쪽에 국한된 ‘반쪽짜리 역사’만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상황이었죠.

유득공의 발해고, 무엇이 달랐을까?
이런 답답한 상황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었습니다. 정조 시대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며 수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던 그는, 잊힌 발해의 역사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죠. “고구려의 옛 땅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를 왜 우리 역사라 부르지 않는가?”
유득공은 단순히 흩어진 기록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았어요. 그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합니다. 바로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남북국 시대’라는 개념이었죠. 이건 당시로서는 정말 파격적인 주장이었어요. 신라의 통일만을 정통으로 보던 시각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거니까요.
그는 『발해고』 서문에서 이렇게 통탄합니다.
>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발해라는 북방의 거대한 역사를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지 못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이었어요. 유득공에게 발해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당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미래의 거울이었던 셈입니다.
남북국 시대 vs 통일신라 시대: 관점의 차이가 만드는 거대한 변화
자, 그럼 유득공이 제시한 ‘남북국 시대’ 관점이 기존의 ‘통일신라 시대’ 관점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한번 표로 정리해볼까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알고 보면 하늘과 땅 차이랍니다.
| 구분 | 통일신라 시대 관점 | 남북국 시대 관점 (유득공) |
|---|---|---|
| 역사적 영토 | 한반도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 | 한반도 전체와 만주까지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 |
| 역사 계승 의식 | 고구려, 백제 멸망 후 신라가 단독 계승 | 신라는 삼한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공존의 시대 |
| 역사적 의미 | 최초의 민족 통일 | 남북 세력의 대치, 불완전한 통일 |
표를 보면 딱 감이 오시죠? ‘통일신라’라는 말에 갇히면 우리의 역사 무대가 한순간에 한반도 남쪽으로 쪼그라들어요. 하지만 ‘남북국 시대’로 시야를 넓히는 순간,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발해의 기상까지 모두 우리 역사로 품게 되는 거죠. 이건 단순히 땅 크기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걸린 아주 중요한 문제였어요. 유득공이 왜 그렇게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시죠? 더 자세한 내용은 국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소환하다 블로그 글을 참고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다들 헷갈리는 포인트: 발해는 정말 고구려를 계승했나?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발해는 지배층만 고구려인이고, 대부분은 말갈족이었으니 우리 역사로 보기 어렵지 않냐?”는 질문을 하기도 해요. 특히 최근 동북공정 논리와도 맞닿아 있는, 아주 민감한 부분이거든요.
하지만 유득공은 물론이고 현대의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보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건국 주체부터가 다릅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명백한 고구려 장군 출신이에요. 건국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둘째, 발해 스스로가 고구려 계승을 천명했어요.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를 보면 스스로를 ‘고려국왕(高麗國王)’ 혹은 ‘고구려 국왕’이라 칭한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보내는 공식 문서에 자신들의 뿌리를 속일 이유는 없었겠죠?
셋째, 문화적 유사성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발해의 주거지에서 발견되는 온돌 문화, 고구려 고분 양식과 비슷한 돌방무덤과 모줄임 천장 구조 등은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거든요. 이런 구체적인 학문적 업적과 증거들은 발해고(渤海考)로 살펴보는 발해의 역사와 유득공의 학문적 업적 같은 글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있으니 참고해보세요.
물론 발해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원적인 국가였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국가의 정체성은 건국 주체와 지배층이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가장 중요하답니다. 그런 면에서 발해는 명백히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역사인 셈이죠.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발해고’가 왜 중요한 걸까?
“옛날 역사책 하나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나” 싶으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건 절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도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 즉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만약 유득공의 『발해고』가 없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는 근거가 희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중국의 주장에 제대로 반박조차 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유득공이 240여 년 전에 쓴 이 책 한 권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 주권을 지키는 튼튼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역사학자들만의 싸움이 아니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자부심을 가질 때,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줄 때 비로소 우리의 역사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이제 무엇을 확인해야 할까요?
자, 그럼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딱 정해드릴게요. 어렵지 않아요.
-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점검해보세요. ‘삼국시대’ 다음은 ‘통일신라’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는지, ‘남북국 시대’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는 거예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여전히 신라 중심의 역사관에 익숙하더라고요.
- 아이들과 역사 이야기를 할 때 꼭 ‘발해’를 언급해주세요. “신라가 남쪽을 통일할 때, 북쪽에는 고구려만큼이나 넓고 강했던 발해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라고 한마디만 보태줘도 아이들의 역사 인식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 역사 논쟁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왜 이런 역사 전쟁이 벌어지는지 궁금하다면, `[[설왕설래] 역사 전쟁](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3517613?sid=110)` 같은 뉴스 기사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배경을 알고 나면 유득공의 『발해고』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실 겁니다.
유득공이라는 한 명의 위대한 학자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릴 뻔했던 거대한 역사를 되찾았습니다. 이제 그 역사를 제대로 알고 지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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