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공민왕의 변발 폐지는 단순한 ‘두발 정리령’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80년 몽골 지배의 상징을 잘라내고 ‘우리는 누구인가’를 되물은, 고려의 정체성 독립 선언이었죠. 다들 그냥 ‘몽골 풍습 없앴다’ 정도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치열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이걸 모르면 그냥 역사책의 한 줄로만 기억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왜 그 많은 것들 중에 ‘머리카락’부터 잘라냈는지 알게 되면, 당시 고려가 처한 현실과 공민왕의 진짜 속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Q. 몽골풍이 대체 뭐길래 그렇게까지 했을까?
“몽골풍이 유행했다”고 하면 뭔가 요즘 K-POP처럼 자연스러운 문화 교류처럼 들릴 수 있는데,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건 유행이 아니라 강요된 흔적에 가까웠어요. 충렬왕부터 공민왕 초기까지 약 80년, 고려는 원나라의 사위 국가, 즉 ‘부마국’으로 그 위상이 크게 떨어졌거든요. 정치적 간섭은 물론이고, 사회 문화 전반이 원나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입니다. 변발은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뒷머리만 길게 땋아 내리는 몽골족 고유의 머리 모양이죠. 호복은 그들의 복장이고요. 이게 처음에는 고려에 와 있던 몽골인이나 그들에게 붙어 출세하려는 일부 권력층만 하던 거였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점점 고려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 겁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게 그냥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고려인에게 머리카락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그걸 강제로 다른 민족의 스타일로 바꿔야 한다는 건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이었죠. 사실상 ‘너희는 이제 우리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자 복종의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도 쓰는 말 중에 몽골어에서 온 단어들이 꽤 많아요. 임금의 식사를 뜻하는 ‘수라’나 아내를 부르는 ‘마누라’ 같은 단어도 사실 몽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이 유력하죠. 매사냥을 위한 ‘응방’을 설치하고, 매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 달았던 꼬리표 ‘시치미’에서 “시치미 떼다”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건 꽤 유명한 이야기고요. 더 자세한 내용은 ‘시치미 떼다’에서 시치미의 유래와 몽골이 고려사회에 미친 문화적 영향 같은 글을 참고해보면 당시 분위기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더라고요.
결국 몽골풍은 고려인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마치 원래 우리 것인 양 자리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공민왕이 마주한 현실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어요.


Q. 공민왕은 왜 하필 ‘변발’부터 시작했을까?
수많은 몽골의 잔재 중에서 왜 공민왕은 변발을 첫 타겟으로 삼았을까요? 그건 바로 가장 확실하고 상징적인 신호였기 때문입니다. 정치 제도를 바꾸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싸움이죠. 하지만 변발을 풀고 고려의 옛 복장을 되찾는 건 즉시 실행할 수 있으면서도 모두에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퍼포먼스였거든요.
공민왕은 즉위하기 전 10년 동안 원나라의 수도에서 머물렀습니다. 누구보다 원나라의 시스템과 그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거죠. 그는 원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력이 쇠퇴하는 시점을 정확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351년, 드디어 칼을 뽑아 든 겁니다.
고려사 기록을 보면, 신하 이현종이 공민왕에게 “변발과 호복은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니니 옛것을 따르소서”라고 간언하자 공민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변발을 풀었다고 나와요. 마치 신하의 요청에 마지못해 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솔직히 이건 잘 짜인 각본에 가까웠을 겁니다.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둔 공민왕에게 개혁의 명분을 실어준 셈이죠.
그리고 변발 폐지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치 도미노처럼 개혁 조치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어요.
- 원나라 연호 폐지 및 고려 관제 복구: 원의 시간을 버리고 고려의 시간을 되찾았습니다.
- 친원파 숙청: 기철을 비롯한 부원배 세력을 제거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죠.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고려 내정에 간섭하던 원나라 기구를 없애버렸습니다.
- 쌍성총관부 공격: 그리고 마침내, 원나라에 빼앗겼던 북쪽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아왔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이때 고려에 귀순하면서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죠.
이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 바로 ‘머리카락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었다는 점. 이게 정말 드라마틱하지 않나요?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것으로 가장 단단한 저항의 시작을 알린 겁니다.
Q. 변발 금지, 생각보다 반발이 심하지는 않았을까?
이 질문, 정말 핵심을 찌르는 부분입니다. 80년이면 거의 세 세대가 바뀌는 시간이에요. 누군가에게 변발과 호복은 굴욕의 상징이었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자 기득권의 상징이었을 수 있다는 거죠.
특히 원나라에 빌붙어 부와 권력을 누리던 권문세족에게 공민왕의 개혁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들에게 몽골풍은 원나라와의 끈끈한 연결고리이자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거든요. 근데 왕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걸 다 버리라고 하니, 순순히 따를 리가 없었겠죠.
실제로 변발을 금지했을 때, 이들 기득권층의 저항과 불만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왕의 명령에 따르는 척했지만, 뒤로는 공민왕의 개혁을 사사건건 방해하고 무력화시키려 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이 결국 신돈 등용과 같은 급진적인 방법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암투가 벌어진 이유도 바로 이 뿌리 깊은 친원 세력의 반발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반응은 달랐을 가능성이 높아요. 오랫동안 몽골의 수탈과 공녀 차출 등으로 고통받아온 그들에게, 왕이 직접 몽골의 상징인 변발을 잘라내는 모습은 오랜 억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신호탄처럼 보였을 겁니다. 차라리 우물에 던져라? 원 간섭기 고려의 눈물과 숨겨진 이야기 같은 글을 보면 당시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거든요. 공민왕은 바로 이 백성들의 민심을 등에 업고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던 거죠.
결국 변발 폐지를 둘러싼 찬반은 단순한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고려를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원나라의 질서 아래 안주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치열한 정치 투쟁의 서막이었습니다.
Q. 그렇다면 공민왕의 개혁은 성공한 걸까요?
성공이냐 실패냐, 이분법으로 딱 잘라 말하기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분명 성공했지만, 다른 면에서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죠.
우선 성공한 점부터 보자면,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감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반원개혁은 이후 고려 말, 조선 초로 이어지는 역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았어요. 만약 공민왕의 이런 시도가 없었다면, 고려는 원나라의 일개 성(省)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그의 업적이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일대기를 보면 그의 가문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 과정에서 어떻게 고려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의 그림자도 분명합니다. 그의 개혁은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개혁의 동력이었던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 급격히 총기를 잃고 방황했던 점, 신돈을 등용해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결국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 점은 아쉬운 대목이죠. 결국 공민왕 자신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고려는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니까요.
결국 그의 개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던진 ‘고려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는 이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작은 변발을 자르는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 파장은 한 왕조의 명운을 뒤흔들 만큼 거대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민왕의 ‘변발 폐지’에서 알아야 할 진짜 의미
이제 글을 마무리할 시간인데,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공민왕의 변발 폐지는 역사책에 나오는 딱딱한 사건이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외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우리의 고유한 모습을 잃어갈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공민왕의 선택은 ‘가장 본질적인 우리 것’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그의 선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해본다면 역사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읽고 끝내지 마시고, 딱 3가지만 한번 실천해보세요. 역사가 훨씬 가깝게 느껴질 겁니다.
- 지금 당장 확인해볼 것: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의 어원을 한번 찾아보세요. 몽골풍의 흔적이 생각보다 깊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상 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거든요.
- 어디서 더 깊이 볼 수 있나: 시간이 된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고려실에 한번 방문해보세요. 공민왕 시대의 화려하면서도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담은 유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겁니다. 책으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요.
- 헷갈림을 줄이는 순서: 먼저 원 간섭기 80년이 고려 사회를 어떻게 바꿨는지 큰 그림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공민왕의 개혁이 ‘왜’ 그 시점에, ‘왜’ 변발 폐지부터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세요. 그러면 흩어져 있던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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