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 그냥 ‘장안성 짝퉁’인 줄 아셨죠? 모르면 손해 보는 진짜 위용
요즘 아이들 한국사 공부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 ‘발해’ 파트에서 꼭 나오는 단골 질문이 있더라고요. “엄마,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장안성을 따라 만든 거라는데, 그럼 그냥 베낀 거예요?” 하고 말이죠. 아마 우리 세대도 학창 시절에 그냥 ‘발해 수도 = 상경 용천부, 당 장안성 모델’ 이렇게 공식처럼 외우고 넘어갔던 기억이 다들 있으실 거예요.
근데 이게 정말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는 거, 혹시 아시나요? 이 단순한 공식 하나가 발해라는 거대한 제국의 역사를 반쪽짜리로 만들어 버릴 수 있거든요. 단순한 모방이었다면, 어떻게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심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사실 우리가 교과서에서 한 줄로 배우고 넘어간 그 사실 뒤에는, 정말 흥미롭고 중요한 이야기가 숨어있답니다. 이걸 모르면 발해 역사의 진짜 알맹이를 놓치는 셈이죠.
다들 ‘장안성 모델’이라고만 외우는데,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어요
우선 맞아요, 발해의 3대 문왕이 수도를 옮긴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모델로 삼아 만든 계획도시가 맞습니다. 네모반듯한 성곽 안에 왕이 사는 궁성, 관청이 있는 황성,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외성을 만들고, 그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주작대로’를 둔 구조까지 아주 비슷하죠.
그런데 여기서 다들 착각하는 포인트가 있어요. 이걸 왜 ‘따라 했는가’ 하는 점이에요. 이건 단순히 좋아 보여서, 혹은 우리가 힘이 약해서 선진 문물을 베낀 게 아니랍니다. 오히려 “우리 발해도 너희 당나라와 대등한 황제의 나라, 문명국이다!”라고 만방에 선포하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어요. 당시 동아시아에서 장안성의 도시 구조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였거든요. 이 표준을 채택한다는 건, 우리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당당한 주역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던 셈이죠.
솔직히 이건 좀 놀랍지 않나요? 그냥 흉내 낸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방식을 이용해 우리의 격을 높이려 했다는 사실이요. 근데 여기서 진짜 반전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국제 표준을 따랐지만, 그 속을 채운 알맹이는 전혀 다른 것이었거든요.

겉모습은 장안성, 속 알맹이는 ‘고구려’ 그 자체
발해 상경 용천부의 진짜 위용은 바로 이 ‘다름’에서 나와요. 겉보기엔 장안성과 비슷해 보이지만, 유적을 깊이 파고들수록 전혀 다른 정체성이 드러나거든요. 바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죠.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온돌’입니다. 상경성 궁궐터에서는 대규모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어요. 이건 정말 중요한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중국의 장안성에는 온돌이 없었거든요. 추운 만주 벌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구려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난방 방식, 그 온돌이 발해 황제가 머무는 궁궐의 바닥을 데우고 있었던 거죠. 겉모습은 장안성의 화려함을 따랐을지 몰라도, 삶의 방식과 핵심 기술은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이어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랍니다.
이뿐만이 아니에요. 출토되는 유물들을 보면 더 명확해져요.
- 기와: 지붕을 덮는 기와의 모양이나 제작 방식이 고구려의 것과 아주 비슷해요. 특히 녹색 유약을 바른 녹유기와는 발해의 특징적인 유물 중 하나죠.
- 불상: 발해의 불상들은 당나라의 화려하고 풍만한 스타일과는 달리, 고구려 불상처럼 힘차고 기상이 넘치는 모습이 특징이에요. 유명한 ‘이불병좌상’을 보면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있는 독특한 양식인데, 이것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답니다.
결국 발해는 ‘선택적 수용’을 한 거예요. 국제 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장안성의 도시계획을 받아들이되, 그 안을 채우는 생활양식과 문화, 정신은 철저히 고구려의 것을 지켜나간 거죠. 이런 자세한 내용은 발해 역사 정리 블로그 글을 참고해보시면 왕들의 업적과 함께 흐름을 파악하기 좋더라고요.
상경 용천부, 과연 얼마나 컸을까? (feat. 장안성, 경주 비교)
“그래서 상경성이 그렇게 대단한 도시였으면, 얼마나 컸어요?” 하고 아이가 물어보더라고요. 사실 크기만 놓고 보면 당시 세계 최대 도시였던 장안성에는 미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신라의 수도였던 금성(경주)과 비교하면 그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죠.
| 도시 (City) | 면적 (추정) | 특징 (Features) |
|---|---|---|
| 당 장안성 | 약 84㎢ | 당시 세계 No.1 메가시티, 완벽한 바둑판 구조 |
| 발해 상경 용천부 | 약 16㎢ | 장안성의 약 1/5 규모, 핵심 구조는 동일, 고구려 문화 융합 |
| 신라 금성 (경주) | 약 9㎢ (월성 중심) | 자연 지형을 활용한 도시, 비정형적 구조 |
표를 보면 크기 차이가 느껴지시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면적이 아니에요. 신라의 금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라면, 발해의 상경 용천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설계된 계획도시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곳에 이 정도 규모의 제국 수도를 단숨에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발해의 국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죠. 단순 크기 비교를 넘어,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들여다봐야 진짜 힘이 보이는 법이거든요. 동시대 동아시아의 여러 수도를 비교한 장안(당), 상경(발해), 헤이조쿄 및 헤이안쿄(일본)의 비교 연구 자료를 함께 읽어보시면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가 되실 거예요.
‘해동성국’의 심장, 국제도시의 면모는 어땠을까?
상경 용천부는 그냥 크기만 한 성이 아니었어요. 그 이름에 걸맞게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국제도시였답니다. 상경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는데, 신라로 가는 ‘신라도’, 거란으로 가는 ‘거란도’,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 등 5개의 주요 교통로(발해 5도)가 바로 그것이죠.
이 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갔어요. 서역의 상인들, 당나라의 사신, 일본의 유학생, 북쪽의 말갈족까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뒤섞여 활기 넘치는 곳이었을 거예요.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처럼 말이죠. 실제로 상경 유적지에서는 중앙아시아 양식의 유리그릇이나 이국적인 모양의 허리띠 장식 같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거든요. 발해가 결코 고립된 나라가 아니라, 활발하게 교류하던 열린 제국이었다는 증거랍니다.
이런 활발한 교류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발해는 전성기 때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상경 용천부는 바로 그 해동성국의 심장이었죠. 고구려의 기상을 품고,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를 꽃피운 위대한 도시였던 거예요.
이걸 알아야 발해 역사가 제대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발해 수도 상경 용천부를 ‘장안성 짝퉁’ 정도로 생각하는 건 정말 큰 오산이에요. 왜 이 미묘한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바로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상경은 그냥 중국 도시 베낀 거야”라고만 생각하면, “발해는 중국의 지방 정권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는 왜곡된 역사관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눈 것처럼, 발해가 장안성의 제도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그 안에 ‘고구려의 정체성’을 확실히 담아냈다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계승’이라고 봐야 하는 거죠.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도 바로 이 지점을 꼭 짚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이제 누군가 발해 수도에 대해 물어보면 이렇게 답해주세요. “겉모습은 당시 국제 표준이었던 장안성을 따랐지만, 그 속에는 뜨끈한 온돌을 놓았던 고구려의 후예들이 살았던 위대한 도시였어!” 라고요.
- 지금 당장 확인해 볼 것: 아이들 역사책이나 박물관 설명에서 상경 용천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한번 보세요. ‘모방’에만 초점을 맞추는지, 아니면 ‘고구려 계승’이라는 독자성을 함께 설명하는지 확인해보는 것만으로도 관점이 달라질 수 있어요.
- 어디서 더 알아볼까: 직접 가보기는 어렵지만, 요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속초시립박물관처럼 발해 관련 전시를 잘해놓은 곳들이 많아요. 온라인 전시관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랍니다.
- 아이와 이야기할 때: “왜 겉모습은 비슷하게 만들고, 사는 방식은 고구려식으로 했을까?” 하고 질문을 던져보세요.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훨씬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다가올 거예요.
이렇게 작은 디테일 하나가 역사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답니다. 우리 역사, 우리가 더 깊이 알고 지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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