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해동성국’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이고, 당나라가 발해를 칭찬한 말이라고 알고 계실 겁니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오니까요. 그런데 만약 이게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당시 최강대국이던 당나라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정치적 발언’이었다면 어떨까요?
솔직히 이 지점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우리 민족 대단했다’는 자부심의 상징 정도로만 생각하죠. 하지만 당나라가 왜, 어느 시점에, 어떤 의도로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는지 파고들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건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을 넘어, 현재의 동북공정 논리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핵심 열쇠거든요.
‘해동성국’,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던 이유
‘해동성국(海東盛國)’. 글자 그대로 풀면 ‘바다 동쪽의 융성하고 성대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말이죠. 이 말을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당나라가 해줬다니, 발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로 흔히 쓰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대부분 착각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이 칭호를 그냥 호의에서 비롯된 ‘선물’처럼 여긴다는 점이죠.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당나라는 발해 건국 초기부터 어떻게든 자국의 통제하에 두려고 했던 나라입니다.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세운 나라라는 점부터가 눈엣가시였거든요.
실제로 발해 2대 왕인 무왕(武王) 시절에는 상황이 험악했습니다. 당나라가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말갈을 이용하자, 무왕은 분노해서 동생인 대문예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했죠. 이 과정에서 당나라와 발해는 심각한 외교적, 군사적 갈등을 겪습니다. 급기야 732년에는 발해의 장문휴가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산둥반도)를 선제공격하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건 그냥 조공이나 책봉을 받는 종속국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죠.
이런 껄끄러운 관계를 생각해보면, 당나라가 갑자기 발해를 향해 “오,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시여!”라고 순수하게 감탄했을 리가 없는 셈입니다. 이 호칭의 등장은 발해가 당나라의 견제와 압박을 힘으로 이겨내고 얻어낸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당나라를 긴장시킨 발해의 진짜 힘
그렇다면 발해는 대체 어떤 힘을 가졌기에 당나라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을까요? 이 ‘해동성국’이라는 별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10대 선왕(宣王) 때입니다. 바로 발해의 최전성기였죠.
우선 압도적인 영토와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선왕은 북쪽의 여러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요동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한반도 북부부터 만주, 연해주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완성했죠. 이런 발해를 당나라가 무시하고 통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졌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국경 전체가 불안해질 수 있었거든요.
경제력과 문화 수준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를 기반으로 당의 제도를 수용하고 말갈의 문화를 융합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은 당의 장안성을 본떠 만들었지만, 온돌 같은 고구려의 특징적인 생활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죠. 이건 문화적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런 발해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정보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 자료에서 확인해 보면 그 독자성을 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는 신라, 당나라는 물론이고 바다 건너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일본도(日本道)’라는 공식적인 해상 교역로가 있었을 정도였죠. 이렇게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구축하며 동아시아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발해를, 당나라는 더 이상 ‘말 안 듣는 변방 세력’으로 취급할 수 없었습니다. 인정해야만 했던 겁니다.
여기서 갈린다: ‘인정’과 ‘인증’의 차이
이게 바로 핵심입니다. 당나라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부른 것은, 마치 품질 보증 마크를 찍어주는 ‘인증(Certification)’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스스로 강대국이 된 발해의 실체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인정(Acknowledgment)’이었던 거죠.
생각해보세요. 계속해서 적으로 두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상대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싸우자니 피해가 막심하고, 무시하자니 이미 동아시아의 주요 플레이어가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공식적인 외교 틀(조공-책봉) 안으로 끌어들여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겁니다. ‘해동성국’이라는 호칭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고도의 외교적 수사였던 셈이죠. 발해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동시에 당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시키는, 아주 영리한 방법이었습니다. 즉, 당나라가 베푼 시혜가 아니라 발해가 쟁취한 외교적 승리에 더 가깝습니다.
| 관점 | 해석 | 비고 |
|---|---|---|
| 일반적 통념 | 당나라가 발해의 번영을 칭찬하고 별명을 붙여줌 | 시혜적, 수동적 관점 |
| 심층적 해석 | 발해의 국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된 당나라가 외교적으로 실체를 인정한 것 | 주체적, 능동적 관점 |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발해 역사를 제대로 보는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해동성국’을 오해하면 안 되는 진짜 이유
“그게 그거 아니냐, 어쨌든 융성했다는 거잖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점의 차이는 현재진행형인 역사 왜곡 문제와 직결됩니다.
만약 ‘해동성국’을 당나라가 내려준 칭호로만 생각하면, 발해는 결국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지방 정권’이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될 수 있습니다. “봐라, 당나라가 인정해줘야만 번성한 나라로 불릴 수 있었지 않느냐”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지거든요.
하지만 진실은 다릅니다. 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여겼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습니다. 이는 해동성국 발해가 우리나라 역사인 이유를 설명하는 많은 글에서도 강조하는 부분이죠. 당나라의 인정 이전에 이미 스스로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독립국가였다는 겁니다.
따라서 ‘해동성국’이라는 표현은 발해가 당나라에 종속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발해의 독자적인 힘이 너무 강해서 당나라조차 무시할 수 없었다는 증거로 해석해야 맞습니다. 발해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국(盛國)’이 되었고, 당나라는 그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뭘 확인해야 할까?
이 글을 읽고 나서 발해와 해동성국에 대해 좀 다른 시각이 생겼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역사를 볼 때 딱 세 가지만 기억하고 확인해보세요. 헷갈림이 줄어들 겁니다.
첫째, 시점(Timing)을 확인하세요. ‘해동성국’이라는 말이 나온 건 발해가 건국 초기의 혼란과 당나라와의 갈등을 모두 이겨내고, 최전성기를 맞이한 선왕 때라는 사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둘째, 의도(Intention)를 파악하세요. 강대국이 하는 말에는 항상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순수한 칭찬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략적 판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셋째, 우리 기록과 비교하세요. 발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고구려 계승, 독자 연호 사용 등)를 함께 봐야 그 나라의 진짜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의 평가에만 의존하면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단어를 보면, 단순히 ‘융성했던 나라’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치열한 국제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냈던 발해의 강인한 역사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진짜 이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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